예배와 성경(5) -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2015. 1. 1 눈내리던 날 집 앞 가로등.
가인과 아벨(창 4:1-12) - 마음을 다하는 예배
히 11:4에 의하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에게는 이러한 평가가 적용되지 않는다. 요일 3:12(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유 11(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에 의하면 가인의 마음 속에는 의로움이 없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모세는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제물 뒤에 숨겨진 예배자들의 마음을 엿보기를 원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논할 때 그 제물에 '피'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조금은 부족한 해석이 아닌가 싶다. 레위기에 나타나는 제사법에서도 '피'가 없는 제사가 존재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인의 제사에 피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고 보기보다는 다른 이유를 찾아야 될 것 같다. 그 다른 이유로 보이는 것은 아벨의 제물에는 ‘첫 열매’, ‘기름진 것’ 등 가장 좋은 것을 드렸다는 설명이 있지만 가인의 예물은 그저 ‘땅의 소산물’일 뿐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아벨은 자기 짐승들 중에서 가장 좋고 기름진 양을 제물로 선별하는 일을 통해 예배하기 전부터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준비했다. 반면에 가인은 때가 되어서, 혹은 별 생각 없이 동생 아벨을 따라 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아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예배를 드렸지만 가인은 형식에 치우치고 그냥 드리는 식의 제물을 드린 것이다.
함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예배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만난다. 하지만 내가 그저 예배하는 자리만 채우거나 예배를 섬기는 ‘일’만 하고 끝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예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배를 드릴 때의 마음자세에 대한 것이다. 형식적이거나 마지못해 예배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혐오하신다.
셋, 에노스(창 4:25-26) -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바탕’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셋의 탄생은 인류의 새 출발의 바탕이 되었다. 셋은 아벨 대신 주신 아들이었다. 하나님은 아벨의 죽음으로 잠시 끊어졌던 믿음의 계보를 대신할 다른 사람을 예비하셨다.
셋이 자라서 아이를 낳았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에노스는 ‘사람’, 혹은 ‘연약함’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람’ 에노스는 가인의 후손과 다른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알리는 이름으로 간주된다. 창세기 저자는 이때에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에노스가 태어나기 이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가인과 아벨 시대에 이미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면 그러한 의미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4:1의 하와의 말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은 ‘여호와의 도움으로’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처럼’ 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중 ‘하나님처럼’이라고 많은 주석가들이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하와의 마음에 교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자신이 아이를 낳은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 가인이었다.
그런 하와가 셋을 낳으면서 하와는 ‘하나님이… 주셨다’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그 교만이 꺾인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낳은 셋의 아들 에노스의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겸손함으로’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때라는 말은 아마도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이 하와처럼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의식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예배하는 일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의식하고 인정하면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