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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예배강의

예배와 성경(13) - 아브라함, 이삭을 바치다.

by 처음사랑 2015. 1. 25.


아브라함과 이삭

12장과 22장은 동일하게 명령형으로 시작하고 있다. 12장은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가라'는 명령으로, 22장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정한 산으로 '데려가라'는 명령이다. 12장은 여태까지의 과거의 삶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며 과거를 내려놓는 것을 명령하고 있다면 22장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주시겠다고 한 약속, 즉 미래에 대한 것을 내려놓게 하는 명령이었다. 아브라함이 과거와 미래를 내려놓게 하는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은 아브라함 여정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세가 이 두 사건을 기록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복이 그들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나님은 정말 사람을 드리는 번제를 원하셨을까? 고대 근동 사람들은 다산을 축복으로 주는 신들은 그 축복의 일부, 즉 일부 자녀들을 제물로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들에게 사람을 번제로 바침으로써 그 지속적인 축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 저자들과 선지자들이 지속적으로 아이 번제를 비난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이 나라로 존재하던 시대에 주변 나라들에서 이런 일들이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근동에서 ‘다산을 제공하는 신’은 소산 중 일부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이것은 짐승, 곡식,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같은 페니키아와 고대 카르타고의 식민지들에서 나온 문헌을 보면 계속해서 다산을 보장받기 위해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제의가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신명기와 레위기에 나오는 성경의 선지자들과 율법은 이러한 관행을 명백히 금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금하는 율법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이를 바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어쩌면 아브라함 역시 그런 관행을 알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그리 놀라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가나안 지역의 신들처럼 인간 번제를 받으실 것인가?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 인해 이 명령이 ‘시험’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이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은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이야기에서 진짜 위기는 이삭의 목숨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이다.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어도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느냐, 혹은 명령 자체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느냐하는 것들의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도, 단절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라고 그냥 '사단의 음성'으로 단정하여 귀를 막거나 지금 들은 음성이 진짜 하나님의 음성인지 의심해보는 과정 자체가 없이 아브라함은 순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의 목숨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택했다.


어쩌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그래, 누구라도 나의 이 선택을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야'라는 말로 자신의 불순종을 정당화 시키고 있지 않을까? 누가 봐도 이것을 택해야만 하는 것, 내 마음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같은 선택이 모든 사람이 볼 때 잘못된 것 같은 일이 내 앞에 닥쳤을 때,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뒤돌아 봐야할 필요가 있다.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는 그것이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해도, 아무리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라 해도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예배이다.


‘모리아’는 성경에 두 번 나온다. 역대하 3:1에 의하면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초목이 울창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만일 예루살렘이 모리아 산이었다면 아브라함이 굳이 장작을 가지고 산을 오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칠십인역은 본문에서 모리아를 고유명사가 아닌 높은 지역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번역했다. 이런 근거로 22장의 모리아와 성전이 지어진 예루살렘과는 서로 다른 지역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나무를 구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다른 곳이라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창세기의 저자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해 예배가 ‘무엇을 드리는가’ 보다는 그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과 마음이 더 중요함을 이야기 했다. 그래서 이삭을 드리는 사건에서도 모리아 산에 가서 장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부터 모든 것을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는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아브라함은 예배할 곳에서 장작을 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 없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준비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당시 살고 있던 브엘세바에서부터 사흘길을 가야 하는 모리아 산에서의 예배를 원하셨다. 왜 아브라함 집의 뒤뜰에서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모리아 산이 그만큼 특별한 곳이었을까? 모리아 산이 그만큼 중요하다면 계속해서 언급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 뒤로는 언급이 되고 있지 않다. 아브라함의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모리아 산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사흘이라는 거리였다. 그 사흘은 아브라함이 결심을 번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실제로 죽이는 것은 사흘 후였지만 마음 안에서는 이미 사흘동안 반복해서 죽이고 있는 것이다.


창 22:5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는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어떤 의미에서 이삭은 더 이상 그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이어서 ‘우리가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표현한 데에는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다.


1. 제사의 참된 성격을 은폐하기 위한 악의 없는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요구에 따라 번제를 드릴 것이라고 말했어야 하지만 희생 제물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동물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2. 그는 결국은 이삭을 바치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고, 마침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것임을 함축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3. 비록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네 후손들이 이삭으로 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들이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으로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브라함이 3번의 마음으로 한 말이라고 믿고 싶다. 

모리아 산 아래 두 종을 두고 이삭만 데리고 올라갔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는 일을 방해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삭은 자신이 번제물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절)’라고 질문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셨을 것’이라고 대답한다(8절). ‘우리가 돌아오리라’는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는 아브라함이 도망갈 틈을 찾고 있음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이 고백에서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었을까?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대답에 대한 해석을 정리하자면 ‘경건한 변명의 걸작’이거나, ‘믿음의 확신을 가진 예언’이거나, ‘하나님, 준비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진술, 예언, 혹은 기도로 이해되도록 의도된 것 같다.


제사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희생제사에서 짐승을 묶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구약에서는 오직 이곳에서만 묶는 행위가 언급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는 행위를 할 때 이삭은 그것에 반항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장작을 지고 산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이삭이 나이 많은 아버지가 하는 ‘이상하고 정신나간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묵묵히 순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9절). 


9절의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라는 서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 산’에 왔지만 제사드릴 곳마저도 ‘지시하신 곳’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아브라함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때가 있다. 그러나 9절을 주목하여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단순히 이삭을 제물로 '예배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굳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장소까지 가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 가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라고만 생각했다면 굳이 사흘이나 걸리는 모리아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모리아에 갔다고 하더라도 사흘동안 걸어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일단 모리아에 도착했으니까 그냥 가까운데서 드려도 될거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종들을 방해할 수 없을만큼만 떨어뜨려 두고 이삭을 바치면 되는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까지 나아갔다.


예배는 그렇게 해야 한다. 단순히 '예배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아브라함의 경우 번제)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자리에서 예배하던 일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예배하든 하나님께서 무조건 기뻐하신다는 것은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에 예배자들이 나아오는 것을 원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아들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믿음을 하나님께 보임으로써 인정을 받았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머리 싸움이 아니었다. 죽이는 척 하면서 '이때쯤 하나님께서 말리시겠지?'라는 생각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재고 있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역사적인 사실’이 될 때 그 믿음은 하나님께 ‘순종’으로 인정이 된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지만 아브라함이 실제로 행동하기를 기다리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예비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그 순간, 정말 적절한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했을 것이다. 너무 빨리 불러서 멈추게 하셨다면 이삭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동을 멈추게 한 그 급박한 부르심까지도 하나님은 정확한 때를 지키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조금만 한눈을 파셨다면 이삭은 죽었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정말도 아들을 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히 11:17-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실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셨다(창 17:19,21; 21:12).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지 않게 하시거나, 죽이더라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그것은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실 권한도, 혹은 약속을 주신 분이 약속을 번복하시고 다른 방법을 통해 이루시는 권한도 가지고 계신 것을 인정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마음 자체로 만족하신다. 어느 경우에는 실제로 내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게 되는 상황도 일어나지만 하나님이 이삭의 피와 살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을 기뻐하신 것처럼 내가 드린 무엇인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드렸을 때 그 순종한 행위 자체를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행동’이다. ‘삶’인 것이다.


* 22:19을 보면 아브라함이 제사를 마치고 언약을 재확인한 후 산에서 내려온 장면이 마치 아브라함이 혼자 내려온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삭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던 부르심은 야곱의 때에 이르렀을 때에 한 종족으로 불리울 수 있는 숫자가 되었다(창 46:27-70명). 

이들이 이집트에 내려가서 430년을 지낸 후에 한 민족이 되었다(출 1:7). 애굽사람들이 자신들보다 숫자도 많고 강하다고(출 1:9) 두려워 할 만큼 그들은 큰 숫자를 이루었지만 아직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만 있고 주권과 영토는 없었다. 출애굽을 한 후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는 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한 나라가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한 사람에서 한 나라가 되었다. 1-72-2,000,000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렇게 성장시키셨고 예레미야의 예언(렘 31:33) 후에는 사람을 통해 지성소,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곳을 또한 팽창시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