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성경(5) - 가인과 아벨
이 제목으로 올렸던 글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창 4:1-8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예배문화, 형식이 존재하고 있다. 많은 예배에 참석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로 예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써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가인은 곡식으로, 아벨은 양으로, 가인과 아벨은 각자의 직업에 적절한 제물을 드렸다. 그들은 한 해 농사의 끝에 제물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자신들의 노동이 열매를 맺자 생업의 소산을 제물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이 사건에 대한 많은 성경학자들의 해석들이다. 다음의 질문들에 스스로의 답을 정해보자.
첫번째, 하나님이 농부보다 목자들을 좋아하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따로 좋아하시는 예배자들의 신분이 존재하는가?
두번째, 하나님은 곡식보다는 짐승제물을 더 좋아하실까? 하나님께서 특정한 예배의 형식을 좋아하실까?
셋째, 요세푸스는 소나 양처럼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곡식처럼 인간이 ‘인위적으로 성장케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해석했는데 이것도 맞는 생각일까? 우리의 예배 안에서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다 배제해야 하는가?
넷째, 그냥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해야 할까?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이해 없이 그저 예배하면 되는 것인가?
다섯번째, 대부분의 해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 대한 접근이 달랐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가인과 아벨이 예배한 근본적인 원칙이 달랐다고 이야기한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번제의 형태에는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의 형태도 있었지만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번제의 기록이기 때문에 이런 근본적인 원칙에 대한 암시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 11:4에 의하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에게는 이러한 평가가 적용되지 않는다.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유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요일 3:12, 유 11에 의하면 가인의 마음 속에는 의로움이 없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모세는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제물 뒤에 숨겨진 예배자들의 마음을 엿보기를 원하고 있다.
아벨의 제물 : 첫 열매, 기름진 것
가인의 제물 : 땅의 소산
각자의 제물에 대한 설명에서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다.아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예배를 드렸지만 가인은 형식에 치우치고 그냥 드리는 식의 제물을 드린 것이다.
아벨은 제물을 고르면서 ‘정결함’을 준비하고 있었고 가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감에 대한 ‘정결함’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모든 초태생이 하나님의 것임을 말하고 있다. 희생제사로 드리거나 예물을 드려 대속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초태생에 대한 인식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근동의 대부분의 민족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가인과 아벨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가인이 화를 냄 : 의기소침? 우울? 화를 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전달되지 않는 것을 느낀다면 나 스스로의 태도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꼭 받아들이셔야 한다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댓가마저도 바랄 수 없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 예배에 대해 어떤 강요도 할 수 없다.
예물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 예배를 위한 댓가지불이 필요하다.
아벨은 누구나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이 기르던 짐승의 초태생, 그것도 흠이 없는 초태생의 짐승을 골랐다. 아벨과 가인은 예배를 시작하는 마음의 태도부터 달랐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다.
레 22:18-22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거류하는 자가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하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을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삼하 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마음을 준비하라. 댓가를 지불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드리고, 재물을 드리고, 내 마음을 드리는 행동이 필요하다. 집에서 쉴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친구와 만나는 시간을 포기하고, 연인과 속삭이는 시간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예배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어려울 때 의지가 될 수 있는 가족과의 삶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떠났던 그 희생이 필요하다.
아벨이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그 태도가 필요하다.
아벨의 예배 후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가?
아벨은 성공적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함께 예배했던 형에게 죽임을 당했다.
댓가지불은 예배 전에도, 후에도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받으셔도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에게 죽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는 더 큰 예배가 아니었을까?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는 자세를 포기하지 않아서 불에 들어가야 했다. 불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남는 놀라운 은혜를 누렸지만 자신들을 불에 던지기 위해 불에 접근했던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살아남는 은혜를 누리기 전에 불에 대한 극심한 공포 앞에 마주해야 했다.
다니엘은 포로기에 바벨론에서 총리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결과는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살아서 나왔지만 사자굴 자체가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사자를 마주 대하는 공포와 지저분한 사자굴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예배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기 직전까지 돌에 맞기도 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경의 인물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잃을 수 있는 위협 앞에서 굴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배에서의 댓가지불은 예배하기 전에도, 예배하고 삶을 살아가면서도 계속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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