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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예배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찬양인도자는..(1)

by 처음사랑 2012. 4. 24.

찬양인도자.

예배팀 가운데서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고

가장 많은 사람이 서고 싶어하는 자리가 찬양인도자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1990년부터 시작한 내 찬양사역의 역사는 2003년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에 세션으로 들어오고 2004년 DTS를 받은 후 2005년 간사로 위탁하면서 지금까지 오고 있다.

때로는 기타로, 베이스로, 드럼으로, 건반으로, 여러 모양으로 예배를 섬기면서 교회에서, 여러 선교단체에서 찬양인도를 수 없이 해봤다.

물론 90년대에는 예배인도의 개념의 찬양인도라기보다는 싱얼롱에 가까운 찬양인도가 많았지만 어느 형태이든 20년 가까이 찬양을 인도하면서(예수전도단에서의 8년을 포함해서;;) 내가 느꼈던 찬양인도자에 대한 것을 적어 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1. 인도하는 예배자(Lead Worshiper)

맷 레드먼이 처음 사용하고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 아주 마음에 드는 좋은 용어이다. 찬양인도자는 - 예배인도자와 찬양인도자가 예수전도단은 구별되어 있지만 두 단어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고 싶다 - 단지 단어 그대로 인도만 하고 예배를 끝마치는 사람이 아니다. 찬양인도자가 스스로 예배하지 못하면 어쩌면 이리저리 준비한 한 공연을 마친 것 같은 허탈감이 예배후에 찾아오게 될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중창과 합창을 많이 했었다. 해마다 합창과 중창, 독창을 준비해서 교회에서 '문학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행사를 했었고 친구가 주도하는 다른 교회의 문학의 밤에도 다른 사람들의 음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으로(주로 테너로;;) 가서 도와주기도 했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성가대와 중창팀을 하면서 이런저런 많은 행사를 거쳤다. 전주시 고등학교 연합성가대 활동도 하면서 참 많은 합창, 중창의 '발표회'를 한 기억이 있다. 그 모든 '발표회'의 기억에는 그 행사가 끝나고 찾아오는 허탈감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예수전도단에서 찬양을 인도하기 전에는 모든 예배나 수련회, 기타 등등의 행사를 마치고 난 후의 허탈감이 자연스러운 것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배'를 하고 난 후에는 그런 허탈감이 없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기 시작했다.


예배를 하고 난 후 허탈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 예배 안에서 내가 진정한 예배를 드렸다기 보다는 잘 준비한 공연을 하나 마친 것 같은 느낌 때문이 아닐까.

예수전도단에서 찬양을 인도하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어느 순간 내가 드리는 예배 안에서 내가 말 그대로 찬양을 '인도'만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인도만 하는 겉모양만 '예배'인 화요모임을 마치고 난 후에는 예전에 느꼈던 허탈감이 미려오는 것을 경험했다.

예배가 공연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예배하지 못하는 찬양인도자는 자신이 인도한 예배 안에서 홀로 낙오하게 된다. 특히 화요모임처럼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교회의 주일, 수요일에 드리는 공예배처럼) 예배가 아닌 경우 대부분의 회중들은 예배하고자 하는 열심을 가지고 모이게 된다. 찬양인도자가 조금 실수를 하더라도 그 회중들은 그 실수보다는 하나님을 만나려는 목적에 더 집중해서 예배한다.

예배하지 못하는 찬양인도자는 어쩌면 이런 회중들보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더 멀리 있는 상태로 예배를 마치게 된다. 찬양을 인도한 사람이 자신이 인도한 사람들의 뒤에 서서 하나님의 보좌를 구경도 하지 못하고 예배를 마친다면, 그것은 그 찬양인도자가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의 목적을 잊은 것이 된다.


또한 찬양인도자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갈 수 있다면 그의 인도를 받은 회중들 역시 하나님의 보좌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이 확실하다. 찬양을, 예배를 인도하면서 자신이 예배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인도하는 회중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더 가까이 갈 수도 있었던 것을 오히려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 내 경험으로 볼 때 - 스스로 예배하지 못하는 찬양인도자로 계속 예배를 섬기게 될 경우 그 일은 결국 지속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전도단에서 찬양인도를 시작하고 나서 몇년이 지난 후 어느 순간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예배후에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행사를 마치고 난 후 느꼈던 허탈감이 찾아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허탈감을 느끼면서 무엇인 문제인지 깨닫지 못하고 거의 1년을 찬양을 인도했다. 매주 화요일에 드리는 그 예배가 허탈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두려워지고 피하고 싶은 '일'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계속 화요모임 찬양인도를 하기 어려운 상태까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공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줄만큼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들려줄만큼 노래를 잘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화요모임을 인도하면 다들 칭찬을 해줬다. '노래를 잘한다', '목소리가 듣기 좋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았다', '콘티가 좋다' 등등. 어느 순간 예배 안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에게 나의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칭찬을 더 듣기 위해 예배를 준비한 것이다.

내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예배는 공연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공연으로만 본다면 칭찬을 들을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어설픈 것이었는데 말이다.


찬양인도자는 예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찬양을 인도할 때 뿐만 아니라 평소의 삶에서도 예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은 회중들을 더 깊은 예배로 인도할 수 있기 위함이며, 찬양인도자 자신이 그 예배 안에서 홀로 낙오되어 실패감을 맛보지 않기 위함이다. 예배하지 못하는 찬양인도자는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사람인 것이다.








집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다보니 횡설수설이 된 듯하다;;

다음에 수정을 하든지 해야겠다.

다음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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