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6: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첫째 : 하늘에 현존하는 천국
둘째 : 장차 임하실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지난 주에는 이사야 6장을 중심으로 하늘에 현존하는 천국에 관하여 살펴 보았다. 이제는 이 땅에 앞으로 임하실 나라로서의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 사 2:4에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전쟁이 없는, 전쟁을 연습하지도 않는 평화의 세계)
위의 말씀은 전쟁이 없는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에덴동산 이후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왔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킹스라이드’ 교수는 그의 저서인 전쟁의 연구에서 ‘수 천년 인간 역사에서 싸움이 없었던 기간은 통산 300년에 미달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전쟁이 없는 기간도 사실 알고 보면 다음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은 수많은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기 때문에 인간의 꿈은 전쟁이 없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1차 대전이(1914-1918) 끝난 다음에 26개의 나라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국제 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불행히도 20년이 안되어서 인간은 2차 대전을 다시 치르게 된다. 마침내 2차 대전에는(1939-1945) 핵무기가 등장함으로써 인간은 엄청난 전재으이 무서움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1차 대전 이후 만들었던 국제연맹은 붕괴되고 더욱 강력한 조직을 만들어서 전쟁을 방지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국제 연합(UN: United Nations)이다. 처음에 51개의 나라가 모여서 인류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으므로 전쟁하지 말자고 했지만 이 기구가 지구상에서 전쟁을 없애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 UN 빌딩은 뉴욕 맨하턴에 있는데 이 건물 건너편 벽에 보면 사 2:4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빌딩 앞 조그만 공원 안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여러 조각물들이 많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중에 구소련에서 기증한 동상을 보면 사람이 칼을 구부려서 망치로 두들겨 부숴뜨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처럼 전쟁을 원하지 않는데 희한하게도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은 평화라는 제목으로 이라크를 공격하고 수많은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성경 역시 인류의 역사는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 선지자는 단 9:26에서 이 세상은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화될 것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마 24:6-7에서 각처에서 난리가 일어나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는 전쟁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가 비록 평화를 원할지라도 전쟁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땅에는 평화는 원하지만 평화는 없다.
그런데 사 2;4에서는 전쟁이 없는, 전쟁을 연습하지도 않는 세계가 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전쟁의 역사 속에서 평화를 기다리는 인류에게 소망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평화의 세계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의 나라가 임할 때에만이 비로소 인류가 꿈꾸는 참된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그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 사 11:1-10에서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운동의 성격(공평과 정의가 실현되고, 만물의 권리와 사람의 권리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세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며으이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사으이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라고 하셨다.
이는 메시야가 오실 때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가 통치하실 때에 공의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6-9절을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우리는 위의 말씀에서 놀라운 장면들을 보게 된다.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 해치지 않으며 서로 존중이 여겨주는 세상, 토마스 무어가 꿈꾸던 세계, 모든 인권해방 운동가들이 꿈꾸는 세계, 모든 환경주의자들이 꿈꾸는 세상 등 진정한 평화와 자유의 세계로서 어린 아이 하나라도, 소 한 마리라도 함부로 그 권리가 손상되는 일이 없고 모든 만물의 권리가 회복되는 세상이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지배받을 수 없는 자유인으로 지음을 받았다. 이 창조의 질서대로 자유의 삶이 실현되었던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그곳에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만물의 관계, 사람과 환경의 관계가 자유한 관계였다. 서로 존중히 여기는 관계였다. 그러기에 이곳에는 기쁨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행복이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자 이때부터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는 파괴되고 자유인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게 된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지배함으로써 약한 자들의 권리는 완전히 부서지고 짓밟힘으로써 고통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이 이제는 강한 자들 앞에서 짓밟히게 된다. 이때부터 인류의 역사는 약한 자들의 한 맺힌 탄식과 고통의 역사가 시작되고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문학 속에서, 때로는 사상 속에서, 정치적인 제도나 사회적인 제도 속에서, 때로는 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간의 권리를 만물의 권리를 회복시키려고 시도해왔다.
물론 이러한 노력으로 오늘의 역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권리가 신장되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는 인간과 만물의 권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짓밟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권리가 좀더 나은 세계를 찾아서 떠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상에 그 어느 나라도, 그 어떤 제도도 모든 인류의 권리를 제대로 회복시킬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런데 본문 말씀 속에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고, 만물의 권리와 사람의 권리가 손상되지 않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세계가 임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이 말씀이 진실하다면 이것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인류의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인류의 권리, 만물의 권리의 회복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국 곧 새로운 세계가 임할 때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 역시 롬 8:20-23에서 모든 만물과 인류가 그 탄식하는 자리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인권 해방 운동가들이나 만물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다면 아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인간적인 해방 운동이나 인간의 권리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운동은 훌륭한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인간의 권리회복이 완성될 수 없다. 하나가 회복되면 그 안에는 새로운 억울함이 생기게 되고 새로운 사람의 인권이 유린되는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의 권리와 만물의 권리가 존중히 여김을 받고 상함을 받지 않는 위대한 평화의 세계는 세상의 인간적인 세계에서는 찾을 수가 없고 천국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훌륭한 인권 운동가도 말할 수 없는 위대한 인간의 권리가 회복되는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고통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인권 해방 운동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러한 나라를 추구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고 경험되어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 11장의 말씀처럼 인간의 권리가 고통받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서로를 존중히 여기는, 억압하지 않는, 상대방의 권리를 짓밟지 않는, 은혜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롬 12:10).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잘 모른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도 잘 모른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나라의 삶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들이 아닐 수 없다.
사 11:1-10은 모든 인류의 간절한 꿈이 실현되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때에 그리고 그의 나라가 임할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 사 25:6-8에서 나타나고 있는 천국운동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죽음과 눈물이 없는 영생의 세계)
위의 말씀은 임하시게 될 메시야 왕국의 영광스러운 잔치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사 25:8에 보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며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에덴에서 쫓겨난 후 인류에게 가장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주제이다. 죽음이 있는 한 인간의 행복의 꿈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자녀의 죽음은 부모에게 절망을 가져오고 부모의 죽음은 자식들을 고아로 만들어 버린다. 남편의 죽음은 가정을 방황하게 만든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죽음이 존재하는 한 인간들은 언젠가는 슬픔 속에 모든 것이 깨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삶을 산다. 항상 얼음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다.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행복은 위험을 안고 있는 행복이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질병으로 사망 선고를 받게 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몸부림을 치나 그 속에서 벗어 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을 추구해왔고, 종교나 과학과 의학을 통해서 죽음이 없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슬픔 속에서 위로할 뿐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죽음이 없는 세계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본문 속에서는 죽음이 없는 세계가 임할 것을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복음인가?
사실 하나님께서는 본문 외에도 성경 전체를 통해서 죽음이 없는 세계가 임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에녹의 사건, 엘리야의 사건, 그 외에도 선지자들을 통해서 죽은 자의 부활과 산 자의 변화를 계시하고 있으며 결국 죽음이 없는 세계가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으며 주님 자신도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세계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직접 죽은 자들을 살리시기도 하시고 결국은 본인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결국 인류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보여 주셨다.
이사야가 예언한 새로운 세계 곧 천국은 인류가 죽음에서 해방되는, 죽음이 없는 영생의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날에 비로소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인류의 꿈은 실현될 것이다.
- 사 35장에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세계 곧 천국운동의 성격(모든 질병과 장애에서 자유하게 되는 날)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5-6)”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류가 안고 있던 또 하나의 고통, 그것은 질병과 장애의 문제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류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 그러나 인류는 아직도 질병과 장애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세월이 흘러갈수록 인류는 새로운 질병들 앞에서 신음하며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들에게 인류가 모든 질병과 장애에서 자유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며 그러한 세계가 올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까지도 그러한 장애에서 해방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롬 8:18-25). 그 날에는 모든 질병에서의 해방의 날이며 모든 장애에서의 자유의 날이 될 것이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장애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가? 장애자를 자녀로 둔 부모의 마음은 일평생 동안 아프게 되고 본인도 고통을 받는다. 우리가 장애자 단체에 가서 보면 배설물도 남이 치워줘야 살 수 있는 자들도 있고,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가 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상태가 너무 심하여 그들의 부모까지 버린 자들도 있다. 그런 사람을 볼 때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들이 그토록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또한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돕고 살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적인 가치를 가진다면 그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본다면 우리는 그들이 그토록 힘든 가운데서도 살아야하고, 또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이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위의 말씀과 같이 그 자유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날이 오면 소경은 눈을 뜰 것이고, 앉은뱅이는 일어날 것이고, 누워 있던 자들은 일어날 것이며, 모든 장애인들이 그들의 장애에서 해방이 될 것이다. 장애는 그들의 종착역이 아니다. 그것은 잠시 입고 있는 옷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날이 오기까지 살아야하고, 또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 35:10에 보면 슬픔과 탄식은 사라지게 되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날에 비로소 사람의 눈에서 슬픔의 눈물은 사라지고 고통의 한숨 소리도 사라지게 된다.
성경은 바로 이 나라가 임하는 한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 61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슬픈 자들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위로하는 방법은 이 날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
위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모든 인류에게 맺혀 있는 한을 풀어 주는 날이 있다는 것이며 바로 이것을 인류에게 전해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라고 하신다.
전쟁과 환경의 어려움, 약한 자들의 고통과 울부짖음, 질병과 죽음 아래서 탄식하며 사는 인생들에게 과연 복음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 곧 천국이 임한다고 하는 복음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전파하셨고(눅 4:43, 마 4:17) 그의 제자들에게 이것을 전하라고 부탁하신 것이다(마 10:7, 눅 10:9).
우리는 바로 이 위대한 복음을 가진 자들이다. 따라서 온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천국 복음을 바로 전해서 그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모든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복음은 어느 지역에서 석유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이야기다.
3절을 보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본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다. 그날에는 모든 슬픈 자들이 화관을 쓰고 영광의 시온에서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계 14:1-5). 고통과 한숨 대신에 찬송을 부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쟁이 없는 세계, 서로 해하는 것이 없는, 모든 만물의 권리가 회복되는 평화의 세상, 죽음이 없는 세상, 질병과 장애가 없는 세상, 슬픔과 탄식이 없는 세계, 이러한 세상이 만약 지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들어가기를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보다 나은 세상을 찾기 위해서 살던 곳을 떠나서 새로운 세계로 떠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겨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나라의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이상적인 꿈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오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어느 곳에도 인간의 꿈을 실현시켜줄 이상세계는 없다. 비록 약간의 다른 환경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디를 가든 인간 차별은 있는 것이며 죽음과 질병의 고통은 있는 것이다. 같은 한국에 있다 해도 약한 자의 권리는 차별을 받게 된다.
우스운 예를 들어보자. 일급 호텔 앞에 낡은 차를 타고 가면은 빨리 비키라고 하는데 좋은 차를 타고 가면 와서 경례 붙여주고 문까지 열어준다. 어느 나라든지 다 마찬가지다. 지구상에는 파라다이스는 없다.
어느 곳이라도 인간의 권리의 차별과 질병과 죽음과 전쟁과 테러의 위험이 있고 슬픔과 탄식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나라에 오셔서 세상 나라를 말씀하시지 않고 바로 이 나라를 기다리라고 하시고 이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러한 인간이 꿈꾸는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나라가 주와 함께 임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에덴동산을 통해서 천국을 보여 주셨고, 다음에는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 왕국을 통해서 천국을 보여 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현실적으로는 당시의 유대나라를 향한 예언자였으나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류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줄 새로운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고 예언한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유대인들만의 글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복음의 말씀인 것이며 그런 면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위대한 선지자인 것이다.
복음 운동이란 것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시시한 운동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정권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 영원한 나라의 운동가들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운동은 세상에서 벌이는 그 어떤 평화 운동이나 어떤 인권 운동이나 어떤 훌륭한 철학과 사상운동보다 위대한 운동이다. 천국은 가장 위대한 철학이요 가장 위대한 과학이요 가장 위대한 의학이요 가장 위대한 문학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나 단순한 꿈이 아니라 실제적인 나라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천국 복음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최고의 가치관과 자부심을 가지고 이 나라를 세상에 알려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지서를 공부할 때에 신학적인 문제만 공부해서는 안되며 죄악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의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에서만 봐서도 안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도들의 글처럼 선지자들도 임하게 될 그 나라를 보고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우리가 바르게 잡아 내지 못하면 선지자들의 글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불과하며 윤리와 도덕적인 역사책에 불과하게 된다.
이사야서를 공부하고 나면 유대나라의 역사가 아닌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져야 한다. 이 나라만이 우리 개개인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각 가정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각 민족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온 세계 온 인류의 꿈이 실현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사야서는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에르이 멸망과 회복을 예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나라의 실물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의 임재를 예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보면서 임하실 메시야와 천국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성경의 겉 부분만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서의 주제가 무엇인가라고 할 때에 당연히 메시야의 임재하심과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올바른 성경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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