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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예배강의

예배와 성경(4) - 타락

by 처음사랑 2014. 12. 29.


YWAM Worship 2014@Jeonbuk, 온누리교회



타락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은 '저것을 따 먹어라'라고 대놓고 죄를 지으라고 유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에게 던진 질문에서 뱀은 하나님의 말씀에 '조그마한 것'을 더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처음부터 '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사실은 먹어도 되는 것인데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까봐 먹지 말라고 한거야'라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질문으로 관심을 '모든 나무 중 먹으면 안되는 나무'에 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뱀의 이런 말과 행동은 사람이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에 무엇인가를 고치거나 더하기 시작하면 끝에 가서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래서 이것을 기록한 모세는 두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일이나 빼는 행위를 금지한다(신 4:2; 12:32).


뱀은 완전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드러내어 죄를 짓도록 유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직접 들은 아담이 하와에게 대충 설명했을리는 없다. 뱀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접근했다면 하와는 절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뱀은 하와가 '의심'할 수 있을만한 말을 던져 주었다. '진실이 섞인 거짓말'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유혹의 성격이다.


뱀의 '진실이 섞인 거짓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실수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뱀의 말에 대답하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여자는 뱀의 비아냥에 맞장구 친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질문에 '다 먹을 수는 있는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하며 뱀이 질문한 뉘앙스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다. 하와는 어쩌면 남편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들을 때 불편한 감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저건 안되지?'라는 의문을 평소에 품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하와의 엉뚱한 대답은 뱀에게 마음을 연 것이나 다름 없었다.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가만히 속삭일 때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에 대해 부정적이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기 시작하면 이미 우리의 마음은 죄로 기울게 된다.


뱀은 여자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라 부부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아담 혼자 있었기 때문에 2인칭 남성 단수를 사용하여 말씀하셨다(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3:1에서 뱀은 하와와 대화하면서 2인칭 복수를 사용한다. "너희에게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라고 질문하고 있다. 이 말에 하와는 대답에 단수가 아닌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2-3)".


뱀은 2인칭 복수로 다시 말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5)".


뱀과의 대화는 하와가 주도하고 있지만 복수형으로 쓰인 부분을 살펴보면 아담 역시 하와의 생각에 함께 동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죄는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다. 뱀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뱀의 말에 유혹되고 있다.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의 말을 더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피조물의 말에 귀기울이기 시작할 때 죄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3:6)' 보이기 시작한다. 죄가 처음부터 더럽고 추악해 보인다면 누구도 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죄로 인도하는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될 수 없음을 당연히 알 수 있다. 죄는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다.


죄는 욕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크고 놀라운 사실인데 인간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 많은 것을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하여'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얻은 것은 수치와 두려움이었다(3:7-8). 분명 뱀이 말한대로 그들의 눈은 밝아졌다. 하지만 밝아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이었다. 속았다는 것을 의식한 후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숨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회개를 원하셨다. 그래서 숨어 있는 인간들을 향해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며 찾으셨다.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회개하기를 종용하신 것이다.


아담은 왜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덥석 받아 먹었을까? 하나님이 주신 배필이며 자신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내이기 때문에? 그 아내가 먹으면 죽는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함께 죽으려고 먹었을까? 그런 이유였다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따먹은 이유를 물으실 때 아내에게 죄를 전가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3:12). 아내를 따라서 먹었다기보다는 자신이 보기에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웠기 때문에 먹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내만 하나님처럼 되면 자기만 뒤쳐지니까 아내에게 지기 싫어서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에덴에서 함께 거하며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이었다. 인간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고 함께 뛰고 놀기를 원하셨다.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을 타락할 기회를 주셨을까”라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타락을 택할 기회 밖에 없었나”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가지고 놀 수도 있었고 그것을 따서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있었다. 먹지만 않으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어겼다. 그들에게 ‘먹으면 정녕 죽으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키셔야 했던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우리는 느껴야 한다. 에덴에서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 나아올 길을 예비하셨고 그 길을 넓히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준비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범하기를 기다리며 벌을 준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 죄를 범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죄를 사할 방법을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신다. 그분이 자녀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따르게 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방향을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살기 원하신다. 그들이 죄를 범하기 기다려서 벌을 주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마음 깊이 아파하시며 돌아올 길을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기억하며 첫 번째 지성소였던 에덴을 우리의 예배와 삶 안에서 회복하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목적이다. 예배 안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이나 일주일간의 스트레스가 풀린다거나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해 예배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우선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예배 안에서, 삶 안에서 회복되는 것이 우리가 힘써야 할 가장 첫 번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