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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예배강의

예배와 성경(3)

by 처음사랑 2014. 12. 28.


UofN Workshop, 2008년 제주



인간창조와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2-3장에서 20 차례가 사용되는데 이 곳을 벗어나서는 오경 전체에서 출애굽기 9:30에서 한 번 더 사용되고 나머지 구약성경에서도 매우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문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것이 창세기가 서로 다른 문서들을 조합해 만든 것이라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호와'라는 명칭과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혼합되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없이 그저 존재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이시고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으시며 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고 그들을 에덴 동산에 두셨다. 동산을 경작하고 가꾸게 하기 위해서였지만(2:15), 더 중요한 목적은 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관리할 존재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에 살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함께 하기 위한 존재를 창조하셨던 것이다.


'에덴 동산'은 정확하게는 '에덴에 있는 동산'이다. 즉, 에덴이라는 지역에 있는 한 동산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에덴 동산은 성막, 그곳에서도 지성소의 모형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해서 죄를 지은 사람이 에덴에 거할 수 없듯이 죄가 있는 사람이 성막, 곧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아담이 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듯이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최초의 지성소라 할 수 있는 에덴 동산에서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제 하셨듯이 현재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거룩한 지성소에 나아온 그분의 백성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예배 안에서 그분 앞에 가까이 나아오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딱딱하게 굳어 삭막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아담과 하와를 만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네 개의 강이 시작되어 세상으로 흘렀다. 넷은 완성을 상징하는 숫자이며, 에덴 동산에서 네 개의 강이 흘러 온 세상을 적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비롯되었음을 상징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이 강은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축복의 강을 만날 수 있으며 그 강가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 뿐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을 누리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오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은혜를 흘려보내 누리게 하신다.





*성경안의 숫자들

3, 7 10, 12 

완전수, 거룩한 숫자

144,000이라는 숫자가 성경 안에 있는 것을 근거로 글자 그대로 144,000명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다. 144,000이라는 숫자는 (12*12)*1000을 통해 만들어진 숫자이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거룩한 백성(구원받은 백성)의 상징적인 숫자를 각각 12*12로 보고 '수없이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 1000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숫자가 144,000인 것이다. 실제 숫자 144,000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시간 동안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을 뜻하는 숫자이며 천국에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인 것이다.


666 

적그리스도의 숫자


430

속박과 노예생활의 상징

애굽에서 종살이한 햇수 430,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해로부터 바벨론으로 귀양가던 해까지가 430,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온 때부터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시작된 해까지가 480,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시작한 해로부터 귀향민들이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기로 결정한 때까지가 480년이다


40 

고통과 위기의 숫자, 세대를 상징


14 강조

마태복음의 연대는 아브라함-다윗, 다윗-바벨론 포로생활, 포로생활-예수 그리스도까지를 14-14-14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구약의 계보를 추적해보면 이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으며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께지는 42대보다 많은 세대가 있었다. 구약에서는누구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세대의 차이를아들 표현하기도 할만큼 매우 유동적이다. 그러면 마태는 14라는 숫자를 강조해서 표현했을까.

창세기 안에서 14라는 숫자를 찾아보면 이렇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 머물면서 아내를 위해 14 동안 종살이를 했다. 요셉은 17살에 애굽으로 끌려갔다가 14년째가 되는 해인 30 국무총리가 되었다. 창세기에서 14라는 숫자는 속박과 억압의 숫자인 것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계보를 14-14-14대로 정리하는 것은 죄의 노예가 되어 고통받고 있는 인류에게 그들을 묶고 있는 모든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케 하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