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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예배강의

예배와 성경(46) - 하나님의 성품

by 처음사랑 2015. 11. 11.



하나님의 성품

호 2: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여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알이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알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할 때에 그들은 바알이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인줄로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내가 만들어 낸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바꾸어서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믿음이 좋다고 생각한다. 예배때 손을 들고 찬양하면서 '나는 믿음이 좋아'라고 생각하고 엎드려 기도하면서 '나는 믿음이 좋아'라고 생각한다. 어떤 행위로 믿음이 좋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으며 그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교회만 다닌다고, 예배에 잘 참석하고 겉보기에 열정적으로 예배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호세아는 ‘하나님을 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라는 단어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Barah(영:create)"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주어, 목적어가 꼭 필요하고 의지를 내포한다. 의지를 내포하지 않는 단어는 asha(만들다:make)이다. 창조라는 단어는 무에서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유에서 창조하는 것은 yachal이라는 단어를 쓴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가 처음의 상태였다.


이런 곳을 하나님께서 운행하셨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를 위해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셨다. 운행(Rachaph)이라는 단어는 독수리가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늘에서 빙빙 돌며 나는 것을 의미한다. 또 헬리콥터가 한 점을 중심으로 도는 것, 닭이 알을 가슴에 품고 돌릴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왜 ‘운행’하셨을까. 하나님은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전지하시다면 ‘생각’은 필요 없으시다. 생각하지 않으셔도 사자를, 나무를 만들 수 있다.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기 때문에 고민하거나 생각하고 계획하지 않고 그냥 창조하셔도 실수가 없으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어떻게 창조할까.


세상을 창조하신 것에 의도하신 바가 있다는 것이다. 깊이 생각하셨다. 그냥 만드시지 않으셨다. 습관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시고 의도하셔서 만드셨다. 하나님의 기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었다. 그분이 보기에 좋게 창조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 우리는 완벽을 바라지만 하나님은 좋은 것을 바라셨다.


우리는 몸 안에서 물을 밖으로 배출하지만 물속에 있다고 해서 물이 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끓는 커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이빨이 깨지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창조하셨고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다'.


시 139:17-18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매장지가 애굽에 없었냐고 불만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다음 수를 이미 생각하고 계셨다. 홍해를 가르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홍해를 건너갈까, 쫓아오는 애굽군을 어떻게 상대할까 고민하고 불만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은 이미 그 모든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준비하고 계셨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것이 예배의 출발점이다.


이해가 안돼서 못믿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해가 먼저이다. 우리도 은연중에 이해가 먼저이다. 그러나 사실은 믿음이 먼저이다. 네비게이션이 길을 알려주는 것을 믿고 가는 것이지 알고 가는 것이 아니다. 같은 길을 다음에 갈 때에는 알고 간다. 이것은 종교의 영역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믿음이 이해로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증명이다. 증거가 있을 때 힘이 생긴다.


믿음은 암기된 믿음과 증명된 믿음이 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고 아버지라는 것을 암기되어 있어서 알고 있는 것과 내가 그것을 경험하고 증명된 믿음으로 가지는 것이 더 힘이 있는 것이다. 암기된 믿음에는 역사하는 힘이 없다.


내가 가진 믿음과 정반대되는 상황에 닥칠 때 암기된 믿음이 증명될 기회이다. 암기된 믿음이 증명된 믿음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것이 고난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라는 기도는 어쩌면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암기된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증명된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다르다. 우리가 증명해야 할 믿음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고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의 무게가 같아도 엔진에 따라 가속력이 다르다. 모든 사람의 삶의 무게는 똑같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엔진의 성능에 따라 시험을 이기는 능력이 다르다. 암기된 믿음은 시험이 다가왔을 때 포기해버리지만 증명된 믿음은 ‘넉넉히’ 이긴다.


이것이 예배의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힘이다. 하나님을 확실히 아는 것. 하나님을 확실히 신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