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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예배강의

예배와 성경(48) - 선악과

by 처음사랑 2015. 11. 29.




선악과

에덴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가장 친밀하게 존재하셨다. 하나님과 사람은 정말 가까운 사이였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거니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지 알고 계셨다. 근데 왜 만드셨을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사단의 전략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거니셨다는 표현이 있다. 사람과 하나님은 동산에서 함께 걸을만큼 친밀했다. 사단이 와서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하면 그 말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사단이 사람에게 심어준 것은 ‘부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게 한 것이었다. 에덴에서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서도 ‘의심’하게 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바꾸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 수 있을 것을 알았다. 그는 알면서도 시험했다. 부정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전제하면서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상을 가지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그 공격은 끊이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이 널 사랑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널 사랑하는데 왜 사고가 날까? 왜 대학에 떨어질까? 왜 가난할까?’라는 질문들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의심하게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내 감정을 선택할 것인가 내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감정을 선택할 것인가 진리를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어둠의 순간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느낌으로 살 것인가 진리로 살 것인가.


사단은 분명히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셨을 때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시험하러 왔다면 예수님께 접근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단의 시험은 분명히 알기 쉬운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80% 정도 사용하고 있다. 사단은 목탁을 치면서 다가오지 않는다.


선악과에 대한 명령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창 2:17에서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와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선악과를 따서 만지고 놀고 버려도 죄는 아니다.

우리는 질문을 ‘하나님이 아셨을까 모르셨을까’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과를 먹는 운명 말고는 없었는가’로 바꿔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서 버릴 수 있었다. 선악과를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들이 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죄를 즐기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죄가 고난이라면 사람들은 죄에 달려들지 않을 것이다. 죄가 사람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죄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끊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죄를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서 오는 기쁨을 사모하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죄를 짓고나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죄를 즐겼던 것이다.


기름부으심은 기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와 얼마나 싸워내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거룩함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