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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예배강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에서 출발한다.

by 처음사랑 2017. 12. 23.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중이었다. 4절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말씀하는 것은 길 가는 도중에 사마리아가 있기 때문에 들러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목적이 있어서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들어가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셔야 했다.

이 여인은 대체로 음탕하고 부정한 여인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요 4:17-1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 심지어는 지금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었다. 현재의 남자와 어떤 관계였는지 불분명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면 이 여인은 음탕하고 부정한 여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율법과 문화와 관계하여 이 여인을 바라보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이혼에 관한 권리는 전적으로 남자에게 있었다. 모세의 율법에 이혼이 허용되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다.


신 24: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발견했을 경우 남자가 이혼을 결정할 수 있었다. ‘요구’가 아니라 ‘결정’이었다. 문제는 이 ‘수치되는 일’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당시 율법을 해석하는 학파가 크게 두 학파가 있었다. 샴마이와 힐렐 학파가 그 두 학파인데 샴마이 학파는 율법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고 힐렐 학파는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해 해석했다.

그래서 신명기 24장 1절의 ‘수치되는 일’을 샴마이 학파는 간음, 간통으로 해석했으나 힐렐 학파는 좀더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아내가 남편을 ‘부끄럽게 하는 사소한 일’까지도 이혼의 사유로 정당하다고 해석한 것이다.

남자들이 선호한 해석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 샴마이 학파의 해석보다는 힐렐 학파의 해석을 따랐다.

이혼에 관한 권리가 남자에게 있고, 그 사유를 자의로 해석할 수 있다면 이전에 남편이 다섯이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은 부정한 여인일까, 다섯번 버림받은 불쌍한 여인일까.


요 4:19-20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인이 예수께서 선지자이신 것을 알고나서 바로 질문한 것은 ‘예배’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이 밝히지 않은 과거와 현재 상태를 알고 있는 놀라운 사람을 만났을 때 나오는 첫 질문은 바로 현재 자신이 가장 갈급한 부분에 대한 것일 것이다.

다섯번 결혼 생활을 실패하고 지금 현재 있는 사람과도 불분명하고 불안한 관계의 상태를 가진 여인의 첫 질문은 자신의 삶과 결혼, 행복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에 살던 여인이었다. 예루살렘과 근처 지역의 정통 유대인들에게 배척받던 사마리아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성에 성전을 따로 지어놓고 그곳에서 예배했다.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인 여인은 결코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할 수 없었다. 문제는 다섯 번의 이혼 경력으로 주위 사람들이 이 여인을 부정하고 더럽게 여기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부정한 취급을 받는 여인은 사마리아의 성전으로도 예배하러 갈 수 없었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이혼당한’ 경력으로 인해 이 여인은 물조차도 남들이 활동하지 않는 한낮의 시간에 뜨러 다녀야 했고 당연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개적인 예배 장소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예배할 수 없었던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인식했을 때 나온 첫 질문이 예배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갈급함이 있었다. 어느 곳에서도 자신에게 함께 예배하자고 하지 않았고, 예배하고 싶어도 예배하러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던 이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요하게 만들어줄 재물이나 행복하게 만들어줄 배우자가 아니었다. 이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었고 이 여인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예배의 가장 중요한 첫 출발점은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