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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예배강의

예배와 성경(49) - 거라사 사건과 예배

by 처음사랑 2016. 9. 8.





막 5:6-17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마 8:28-34, 눅 8:26-39, 막 5:1-20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 동쪽으로 가셨다. 갈릴리 남동쪽에 위치해 있던 가다라, 거라사가 속해 있는 데가볼리 지역으로 가셨다. 이 지역은 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그곳에 가자마자 예수님은 귀신들려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셨고 그 사람 안에 귀신에게 나오라 명령하셨다.

그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들어갈 다른 곳을 원했고 예수님은 귀신이 제안한 돼지 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귀신들린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죽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해서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요구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예수님이 명령하시니까 귀신이 나갔구나,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원했구나 하는 정도일까?


먹지도 않을 돼지를 왜 길렀을까?

알렉산더가 죽은 후 많은 곳에 헬라식 도시들이 지어졌다. 헬라의 속국이었던 유대 지방에도 역시 헬라식 도시가 지어졌는데 갈릴리 남동쪽에 지어진 열개의 도시를 통틀어 데가볼리라고 불렀다. 본문에 나타나는 거라사나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가다라 역시 이 데가볼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다메섹 역시 데가볼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데가볼리 지역에는 주로 이방인들이 거주했고 일부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 돼지를 기르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고 극히 일부의 유대인들이 돼지를 길렀다. 율법이 금지하고 있어서 먹지도 않을 돼지를 왜 길렀을까? 그 이유는 당시 로마의 신전에 제사할 때 사용하던 제물이 돼지였기 때문이다. 헬라가 망하고 로마 제국이 일어난 후 많은 로마의 신전이 로마 제국 전역에 세워졌고 제사 역시 많이 드려졌다. 유대 지역에도 역시 로마의 신전이 세워졌는데 그중 데가볼리가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즉, 그 지역에서 돼지를 기르던 사람들은 로마의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거나 로마의 신전 제사에 필요한 제물인 돼지를 공급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돼지들은 어느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일까?

마태복음의 가다라와 마가복음의 거라사는 서로 다른 도시이다. 그런데 각각의 본문을 읽다보면 두 도시가 같은 도시인데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명확하게 성경 배경을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가다라나 거라사가 바닷가에 가깝게 있는 도시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본문에 나타나는 거라사는 갈릴리로부터 48키로미터 이상,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가다라는 13키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귀신이 들어간 돼지떼가 바다로 들어가 몰사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 정확히 거라사나 가다라 지역 중심이 아니라 ‘그쪽 지방’이라는 해석이 있고 또 하나는 돼지들이 빠져 죽은 ‘바다’가 갈릴리가 아니라 거라사나 가다라 지역에 있는 작은 호수나 강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유대인들이 물이 많으면 그냥 ‘바다’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에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다(6절)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명령하셨을 때 귀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구약시대부터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칭할 때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즉, 이 표현은 귀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은 어떤 고백인지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고백하는 것이 과연 내 마음 안에서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고백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들어서 알고 있는,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니까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을 습관적으로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어떤 예수를 고백하고 있는가? 그저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로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지, 아니면 인격적으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깊은 곳의 신앙고백으로 말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귀신들린 사람이 정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15-17절)

  1. 그들은 자신들의 이웃이었던 사람이 귀신에 들린 것을 보았다. 그 사람과 함께 있기 괴로웠기 때문에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가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귀신들린 사람이 스스로 무덤가로 갔는지 사람들이 그곳으로 추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덤가에 살고 있던 그 사람이 귀신이 나가고 자신들과 동일하게 정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정상이 되는 과정에서 죽은 돼지떼를 보면서 예수님을 두려워 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회복이 되고 치유가 되는 이웃을 인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다가올지 모르는 손해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2. 데가볼리 지역의 사람들은 주로 로마의 신을 예배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진짜 하나님이 오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예배해야 할 대상이 눈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섬기던 거짓 신들에게 제사할 제물이 죽은 것 때문에, 그 제물을 공급하면서 자기에게 오게 될 물질적 이익이 없어질 것을 염려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나시기를 구하고 있다. 정말 예배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어쩌면 그 사람들은 로마의 신을 예배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제물을 예배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진실되게 내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아니면 습관적으로 예배하고 고백하는가?
  2. 예수께서 하시는 이들을 보면서 기뻐하는가, 아니면 예수께서 하신 일들이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일로 인해 내가 손해볼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3. 나는 무엇을 예배하며 사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인가? 우상은 만들어진 어떤 형태가 있는 거짓 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하나님보다 돈이 더 소중하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하나님보다 공부가 더 소중하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하나님보다 이성이 더 중요하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뿐만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지금 당장은 예배하지 않고 돈 버는 것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것도 우상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지금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우상이다. 


예수님은 부정한 이방인들의 지역인 데가볼리에서 부정하고 더러운 무덤가에서 살고 있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셔서 그를 회복시키셨다. 더러움과 부정함이 이 본문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더러운 귀신들을 더러운 동물인 돼지에게 추방해서 그 사람에 대한 치유를 보여주셨다. 돼지떼가 죽은 것은 더러운 지역에서 더러운 것을 치우는 일을 통해 이방에서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세상을 부정함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주시면서, 한편으로 로마의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지역에 가셔서 진정으로 예배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